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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가련한 공주님. 단편글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씨 탓에 시야는 짙게 밴 수증기로 뒤덮여 뿌옇고 불투명했다.
 달빛조차 퇴색해버린 거리를 밝히는 건 이따금씩 창백하게 빛나는 백색 가로등이었고, 그것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너무나 익숙하고 지지부진한 클리셰처럼 상황을 더욱 예리하게 몰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적막 속에 갇혔다. 아니, 스스로를 감금했다. 밤은 일말의 소음조차 허락치 않았다. 칼날처럼 예리해져버린 신경은 일종의 병적 질환이 되어가는 듯 했고, 직감은 머지 않아 큰 일이 터지고 말리란 걸 강하게 암시했다.
 루비는 단 일 초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로 앞까지 맞닦드린 위험을 경고하는 암시는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틀어진 두 개의 직선이 결국엔 접점을 가지게 되듯, 처음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절정의 순간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무수한 실전 경험으로 말미암아 예측할 수 있는 순간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 순간 루비는 논리적으로 판단할 겨를도 없이 직관에만 의지해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폭발음.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녀의 몸을 포옹하듯 덮쳤을 폭발의 섬뜩한 열기가 등 뒤를 따뜻하게 덮었다. 방금 전만 해도 서있었던 아스팔트 도로는 거대한 불기둥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린 무수한 돌의 파편으로 흩어졌고, 산개해있던 뿌연 증기는 열기에 집어삼켜져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밤의 암흑이 단번에 붉게 타오르며 밝혀졌다.
 그대로 한바퀴를 굴러 몸을 일으켜세운 루비는 언제든 도약하거나 회피할 수 있게끔 무릎을 움츠려 힘을 주었다. 일 초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재빠르게 주변을 살펴, 방금 날아온 더스트의 방향을 역추적했다. 루비는 머지 않은 곳에 서있는 역광의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형상이었다.
 실루엣의 양 손이 다시 밝아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붉은색 더스트가 이글거리는 불의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그 불덩이가 이쪽을 향해 쇄도하기까진 앞으로 찰나의 시간만을 남겨뒀을 뿐이라, 루비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튀어오르듯 도약했다. 가상력을 이용한 그녀의 몸은 날아오는 불덩이보다도 빠른 속도로 방금 전 발견한 여성의 지척까지 쇄도했고, 불덩이는 뒤늦게서야 루비가 있던 자리를 강타하며 또 다시 지옥불 같은 염화를 화륵 피어올렸다.
 루비는 부서져라 쥐고 있던 크레슨로즈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여전히 몸이 공중에 떠있는 채로 휘둘러진 무기는 허공을 갈랐고, 그 자리에 있어야할 여성의 몸은 또 다시 수 미터로 벌어진 뒤였다. 생각보다 훨씬 민첩했다. 루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묵직한 총성을 내며 등 뒤를 향해 탄환을 쏘아보낸 크레슨로즈가 반동력에 힘 입어 또다시 루비의 몸을 그 여성의 지척까지 단숨에 데려다주었다.
 루비는 다시 있는 힘껏 휘둘렀다. 이번에도 예리한 날이 갈라내버린 건 허공이었지만, 루비는 그 순간 그 정체불명의 여성이 손아귀에서 피어올린 붉은색 더스트가 발광한 덕택에 그 무법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만큼은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지나는 지극히 느린 영상을 보는 듯 했다. 휘둘러진 크레슨로즈가 시야의 대부분을 가렸기에 처음엔 목덜미와 가냘픈 턱 밖에 볼 수 없었지만, 이내 크레슨로즈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이동함에 따라 불투명한 막을 걷어내듯 여유로운 미소를 내짓고 있는 붉은 입술을 볼 수 있었고, 그 다음엔 오똑한 콧날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론,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주황빛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이쪽을 응시해오고 있는 장면을 똑똑히 두 눈으로 확인했다.
 "아…."
 신더 폴(Cinder Fall). 신더 폴이었다.
 루비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냈지만,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선 쥐고 있는 병기를 다시금 거세게 휘둘렀다. 이번에도 허공을 갈라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더이상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착지해버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 위로 불덩이가 지나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타는 듯한 열기가 등을 개걸스레 핥고 지나간 직후, 루비는 고통을 참고선 다시 허리를 펴내며 동시에 크레슨로즈를 대각선으로 휘둘러 올렸다. 다시 빗나가길 무섭게 루비는 자신의 몸 또한 관성에 의탁해 한바퀴 돌리며 재차 휘둘렀다. 이번엔 빗나가는 대신, 예리한 무언가에 명중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튕겨 올라갔다.
 뭐지? 날카롭게 눈을 좁히며 그 짧은 순간 확인했다.
 어느새 신더의 양손엔 새까맣게 그을려진 형상을 하고 있는 칼 두 개가 각각 쥐어져 있었다. 그 뒤론, 더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신더는 지극히 절제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무차별적인 속도로 양손에 들린 칼날을 이용해 베고 찌르고 휘두르며 반격해왔다. 단번에 공수가 뒤바뀌자 루비는 당혹해하며 크레슨로즈를 둥글게 휘둘러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그 다음부턴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속행되어 오는 그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덕이며 크레슨로즈의 날과 손잡이, 장대 등 모든 부위를 이용해 포화와 같은 공격을 전부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이번 공격을 막으면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다시 이어질 다음 공격은 어떻게 진행될지 도저히 종 잡을 수 없었다. 너무나 변칙적인 검술이었고, 이 방식은 여지껏 실전은 커녕 연습으로도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의 것이었다. 다음 수를 미리 예측해야만 반격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루비는 슬슬 불안해져오기 시작하는 가운데, 벌써 도합 서른 번이 훨씬 넘은 신더의 공격을 다시 가까스로 막아냈다.
 "크윽…!!"
 목덜미를 향해 직선으로 거침없이 찔러오는 왼손의 칼은 허리를 뒤로 젖혀 피했고, 거의 같은 순간 허벅지를 향해 휘둘러진 오른손의 칼은 크레슨로즈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둘러 쳐냈다. 신더는 그 반동에 저항하지 않고 되려 몸을 맡겨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한발자국 전진해 찔렀고,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허락된 그 상황에서 루비는 크레슨로즈를 대각선으로 휘둘러 공격을 차단했다. 그러길 무섭게 짧게 뛰어오른 신더는 칼을 역으로 쥐어 루비의 왼쪽 승모근을 내리찍었다. 루비는 그 예리한 칼날이 피부를 꿰뚫고 박히려는 찰나의 순간, 절망적으로 무너지듯 몸을 쓰러뜨리며 피해냈다. 단 한 번도 숨을 내뱉어보지 못한 입술이 순간 열리며, 시꺼멓게 그을린 좌절을 한없이 닮은 신음소릴 냈다. 
 "아으윽."
 쓰러지는 몸이 땅에 닿기도 전이었지만 루비는 이미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꼼짝 없이 체크메이트였다.
























 이대로 죽게 되는걸까.
 곧바로 일어나야 한다. 몸이 쓰러지고난 뒤 일 초의 시간이라도, 아니, 그 반의 시간이라도 그녀에게 허락했다간 저 칼은 명치든 목이든, 몸의 단 한 곳만은 반드시 꿰뚫고 말 것이다. 가상력을 이용해야하나? 아니, 그러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손에 쥔 이 붉은 병기를 휘두를 수 있을 만한 여유도 내겐 없다.
 어떻게 해야하나? 식은땀이 흘렀다. 쓰러지려는 몸이 빗물로 축축히 젖은 바닥에 닿는 그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도, 죽음을 눈 앞에 맞닦드린 뇌는 필사적으로 생명을 갈구하듯 모든 것을 느리게 했고 생각과 논리를 비약적으로 빠르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답은 없었다. 
 신더는 짧게 웃더니 여유롭게 다리를 뻗어, 신고 있는 힐의 구둣발로 크레슨로즈를 인정사정 없이 걷어찼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놓여 있었던 루비의 힘없는 손아귀에서 손 쉽게 떨어져나간 거대한 흉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수십 미터를 날아갔고, 이내 땅 위에 예리하게 다듬어진 날을 깊숙히 쑤셔박으며 쳐박혀버렸다.
 "아…."
 짧게 신음소릴 낸 루비는 눈치를 보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조금씩 움직이며, 땅에 닿은 신발로 몸을 조금씩 밀어내며 눈 앞의 여성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져갔다. 아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너무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반항.
 어느새 신더의 양손에 들린 칼은 사라지고 없었다. 신더는 흑막과도 같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극도로위험해보이는 단말마의 웃음. 쓰러진 채 상체만 간신히 일으킨 루비는 신더의 얼굴을 공포에 질려 올려다보았다.
 "루비 로즈…. 과연, 촉망 받는 비콘의 인재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봐? "
 신더가 빙그레 웃었다. 여느 사람들이 보기엔 뇌쇄적일 만큼 아름다운 미소라고 느낄지 언정, 지금 루비의 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악마와 같이 잔혹한 무언가였다.
 루비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선 황급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상황이 마냥 여유롭진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상력을 이용해 그 자릴 도약해 나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무력해져버린 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느렸고, 신더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재빨랐다. 단숨에 머리채를 휘어잡혀버린 루비는 날카로운 비명소릴 내며 발버둥치다가, 휘두른 신더의 손에 반항도 채 못하고선 수 미터를 붕 떠서 날아가버렸다. 떼다 만 전단지들이 무수하게 붙어있는 더러운 골목길 벽 위에 등을 퍽, 부딪히며 허물어져내린 루비는 순간 고통으로 말미암아 시야가 암전하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천천히 다시 밝아왔을 때엔 신더 역시 바로 앞에 서있었다. 또 다시 덮쳐오는 거대한 두려움. 루비는 정상적으로 호흡하는 것도 버거울 만큼이나 질려 있었지만, 신더는 마냥 친근한 표정과 말투, 표정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루비."
 바로 지척에 무릎을 모아 쪼그려앉은 신더는, 육감적인 미소를 지으며 루비의 엉망진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 친밀함을 과시하고 본디 관계를 기만하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루비에겐 더욱 아찔하게 다가와 숨을 급히 들이삼켰다.
 "아,흐윽…."
 루비가 짧게 신음소릴 토해냈다. 그 순간 신더가 두 눈을 소름 끼치도록 형형하게 빛냈다.
 "아아…. 그래, 그 표정."
 그 표정을 본 루비는 힉,하며 순간 숨을 들이켰다가 고개를 훽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전에 본 신더의 표정이 말 그대로 머리칼을 쭈뼛쭈뼛 곤두 서게 할 만큼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던지라 더이상 눈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미쳤다. 그녀는 미친 게 틀림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인 이상 저런 짐승 같은 표정을 지을 순 없었다.
 "그 표정이야. 루비. 난 그런 표정을 좋아해."
 가지런하게 모인, 길고 예쁜 손가락들이 루비의 새하얀 뺨 위로 살며시 와닿았다. 루비는 아찔한 스킨십을 해오는 그녀에게 질릴대로 질려 이젠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숨을 들이키며 눈을 더욱 꽉 감았지만, 더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뒷걸음질쳐보려 해도 벽은 그녀를 위해 무너져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반항하지 마. 사랑스런 얼굴에 흠집 내고 싶지 않아."
 아름답지만 위험한 목소리.
 그대로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그리고 더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신더는 여유롭게 공격을 회피해냈다. 사력을 다하고있는 상대와 달리 그녀는 그저 흥미진진한 놀이를 하듯 여유로운 미소로 모든 공격을 받아넘겼고, 또 어렵잖게 피했다.
 "온실 속 화초는 원래 질기지 못한 법이야."
 측면에서 쇄도해온 공격을 아니나 다를까 여유롭게 피해낸 신더는, 여지껏 몸을 살짝 비틀거나 도약하며 소극적으로 피해내기만 했던 지금과는 달리 이번엔 재빠르게 손아귀를 뻗었다. 신더의 손아귀에 새하얀 옷깃이 붙들렸다. 상대는 그 위기의 상황을 놓치지 않고 기회로 만들었다. 들고 있던 무기를 다시 한 번 깊숙하게 찔러들었지만, 신더는 그저 고개를 옆으로 까딱 비틀었다가 되돌리는 것만으로 그 공격을 완벽히 피해냈다.
 여자는 내뻗었던 손을 빠르게 당겨와 다시 찔러넣었지만 그 어느 공격도 적중하지 못했다. 이미 정해져있는 승패의 싸움을 하듯 절망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소녀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과도 맞서 싸워야 했으며, 또 이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 고조돼버린 자신의 감정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왜? 날 죽이고 싶어?"
 신더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고선, 쥐고 있던 옷깃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소녀는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고서 다시 검을 내질렀지만, 이번에도 신더는 여유롭게 피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기분이 어때? 난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생소한 감정이라 무척 궁금해."
 "닥쳐!"
 다시 찔러들어오는 칼끝을 여유롭게 피해낸 신더가, 요염하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어머, 보기와 다르게 입이 꽤 험한데? 얼음공주님."
 와이스는 속으로 부정했지만, 이미 그녀는 신더의 도발에 넘어가버린지 오래였다. 와이스는 감정에 취했다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 더욱 험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극심하게 절제되지 않은 움직임으로 감정에 오롯이 취해 칼끝을 내뻗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지만, 신더는 여전히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만 공격을 전부 피해냈다.
 "아, 공주님이 아니라 왕자님인가? 공주를 구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쓸모 없는 왕자. 어때? 네 처지랑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와이스는 현실을 부정하듯 더욱 전투에 매진했다. 그 모습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비참해보여, 신더는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얼마나 더 망가질 수 있을까? 재밌을 것 같아. 신더는 잔혹하게 웃고선, 와이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줄 말 한마디를 서슴잖고 내뱉었다.
 "루비랑 아직 자본 적, 아직 없다며?"
 순간 와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치뜬 눈으로 멈추어섰다. 온 몸의 힘이 주륵 빠져나가는 걸 생생히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크게 한 번 휘청거렸다.
 "이걸 어째? 내가 다 더럽혀버렸는데…."  
 그리곤 살갑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제서야 술이라도 취한 것 마냥 비틀대던 와이스의 두 눈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버렸다.
 "개년. 죽여버릴거야. 찢어 죽여버릴…"
 그 순간이었다. 와이스는 난데없이 제 몸이 중심을 잃었단 사실에, 그리고 제 발이 땅을 딯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순간 벙찐 얼굴로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머지 않아 몸은 허물어지듯 땅 위에 등과 엉덩이를 찧으며 털썩 내려앉았고, 뺨 위에선 어느새 예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벤 뺨에서 뜨거운 선혈이 주륵, 흘러내렸다. 신더의 손엔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을 닮은 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명확히 알아볼 틈도 없이, 이내 피어올려진 불길과 함께 단숨에 사라지고 말았다.
 상대의 공격을 읽을 틈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아예 상대의 공격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얼핏 보면 비슷해보이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 엄청난 것이었다. 와이스는 터져버릴 듯한 분노와 온 몸이 으스러질 듯한 절망, 좌절된 희망과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을 비롯한 오만가지의 감정이 뒤섞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는 눈동자로 절망하며, 새하얀 숨을 거침없이 몰아내쉬었다.
 신더는 동정하듯 웃었다. 무력해져버린 와이스를 눈 앞에 둔 신더는 여유롭게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널브러진 무언가에게 손을 뻗었다. 정신을 잃은건지 잠이 든건지 종잡을 수 없는 한 소녀를 들어 제 품에 안았다. 그녀의 품에 안긴 소녀를 본 순간, 와이스의 억장이 단박에 무너져내렸다.
 잔혹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신더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와이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애정을 과시하듯 루비를 더욱 깊게 끌어안으며, 처량한 척하는 눈빛으로 와이스를 동정해주었다.
 "아아, 가련한 공주님."
 미르테나스터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더는 약에 취해 잠든 루비의 뺨을 쓰다듬으며, 보란듯이 도발했다.
 "응? 왜? 뭘 그렇게 진지해져 있어?"
 와이스는 순간 눈 앞이 아찔해졌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거짓말 같았다. 이다지도 무력한 자신에 대한 후회와 자괴감,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 데 어우러져 평생 안고가야할, 그리고 평생 고통스럽기만을 강요하는 무거운 짐덩이를 안겨주는 듯 했다.
 더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신더는 시시각각 일분일초가 다르게 절망으로 물드는, 한 때엔 눈 부시도록 화사했지만 이젠 잿빛으로 변색돼버리고 만 눈 앞의 소녀를 지켜보는 일이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로부터 이 소녀를 완전히 빼앗아왔다는 사실에, 그 잔혹한 진실을 그녀의 눈 앞에서 확인시켜줄 수 있는 이 상황에 더없이 흥분하고 만족해 했다.
 "이 아이는 더이상 네 소유물이 아니야."
 무겁게 짓눌리는 절망 속에서 점멸하듯 깜빡깜빡 꺼져가는 와이스의 두 눈동자엔 더이상 가망이 없어보였다. 신더는 행복하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품 속에서 잠든 루비의 뺨 위로 짧게 입술을 맞췄다가 떼어냈다.
 그 광경을 목전에서 두고 본 와이스는 어금니를 바드득 깨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미르테나스터를 들어올렸다.
 "이제 이 아이는, 내 거야."



































어느 팬아트의 오마쥬로 쓴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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