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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놔. 단편글


























 "어…안녕?"
 실로 난데없는 인사였고, 또 그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첫만남이었다.
 옆에서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고있는 소녀를 다소 경계 어린 눈빛으로 쏘아붙이다가, 다시 붙들고 있던 핸드폰의 액정 위로 시선을 붙였다. 암만 봐도 세상을 멍청하리 만큼 낙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듯한 그 여자애는 자연스럽게 내 바로 옆 빈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길쭉하게 설계돼있는 평범한 벤치의 효용성이 퍽이나 짜증이 났다.
 웬만해선 이렇게 바로 옆에 안 앉지 않나? 처음 보는 사이라면.
 "그, 혹시 내 이름 알아? 난 네 이름 알고 있는데."
 아예 대답을 안 했지만, 녀석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질 일이 없어 보였다.
 "와이스. 맞지? 와이스 슈니."
 오늘 처음 만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 상황이 와이스에겐 딱히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야 좋은 쪽으로든 혹은 나쁜 쪽으로든 학급 안에선 워낙 유명했고, 또 사생대회랍시고 온 이 드넓은 공원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이 꼬맹이 역시 그런 모종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 뻔했으니까.
 와이스는 '떠들려면 떠들어라. 난 내 일 하련다.' 식으로 매만지고 있던 핸드폰에만 오롯이 집중하려 했지만, 계속 기웃거리며 제 핸드폰 액정을 살피려 드는 옆 아이의 도를 넘은 친한 척에 결국 인상을 팍 찌푸려버렸다.
 "야. 자꾸 훔쳐볼래?"
 "어,어어?"
 이름도 모르는 그 아이는 눈에 띄게 당황해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멍 때렸지만 와이스는 조금도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소릴 질렀다.
 "자꾸 훔쳐볼거냐고 너.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러는 거 완전 실례 아냐? 너 나 알긴 해? 이름 말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왜 친한 척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땐 자기 이름부터 말해주는 게 예의 아니야? 기본 예절 교육 같은 건 받은 적도 없고 관심도 없지?"
 "미,미안…."
 속사포처럼 내쏘는 앙칼진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 이목은 다 이쪽으로 쏠려버리고 만다. 물론 관심도 없다. 와이스는 이 정도면 알아서 딴 데로 가겠지, 경험으로 미루어 어림 짐작하며 다시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톡톡 두들겼다.
 "증나게 하고 있어."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뭐 보고 있었어?"
 그리곤 다시 기웃기웃. 어이가 너무 없어 화도 못 내려는 찰나 그녀가 아차,하더니 웃으며 제 소개를 했다.
 "아, 내 이름은 루비 로즈야. 루비라고 불러, 와이스."
 "……."
 얜 참 낯간지러운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래도 얜 상대하면 안될 것 같다. 암만 봐도 내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러나 요원한 바람이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아이와 얽히는 일은 자꾸만 많아졌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비가 계속해 억지 인연을 만들며 끈덕지게 접근을 해온 것이다. 처음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늘 그랬듯 화내거나 소릴 질러 물러나게 하려 했지만, 그건 여지껏 상대해온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녀석에게 만큼은 너무나 일시적이고 무의미한 방편이란 걸 알게 되는 데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뒤론 자연스럽게 무시하기 시작했다. 음악실에 갈 때에도, 급식실에 갈 때에도, 매점에서 마주칠 때에도, 간혹 같은 시간에 받게 되는 체육시간에도.
 문제는 그렇게 우연찮게 마주치는 상황 자체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었다.
 다른 감정을 일절 모르는 듯한 바보 같은 얼굴로 헤헤실실거리며 손을 방방 흔들어대는 그 바보의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한번이라도 '와이스!'라며 부르는 순간엔 복도 혹은 교실에 있던 온 사람들 이목이 다 이쪽으로 집중돼버리곤 했다. 평소에도 이런데 더더군다나 급식실처럼 붐비는 곳에선 더더욱 낯 뜨거워 미칠 지경.
 그렇게 어물쩍 2학기가 지나 정신 차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교과서는 물론 다른 준비물도 빌려주는 사이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때에도 와이스는 여전히 끈질기게 틱틱댔고, 루비는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건 둘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정체성 비슷한 게 돼버리고 말았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데 별안간 누군가가 깨워버린 탓에 루비는 졸린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잠을 깨버리고 말았다. 머지 않아자길 깨운 사람이 와이스란 사실을 알게 된 루비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금새 웃음을 내지었다. 아니, 정말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먼저 자진하여 날 만나러 와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렇게 퍼질러자고 있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 으응,왜? 무슨 일이야?"
 "나 체육복 없어. 빌려줘."
 와이스는 여느때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한쪽 발에 체중을 실어 삐딱하게 서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듯,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한 태도로.
 루비는 잠시 멍 때리다가, 서둘러 고갤 끄덕였다.
 "응? 아, 응. 체육복…."
 어수선한 상태로 의자를 살짝 뒤로 빼 몸을 일으키려다가 발을 잠시 헛디뎠지만, 만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극적인 장면처럼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루비는 교실 뒤편의 사물함에 가 여덟 개의 숫자가 있는 싸구려 자물쇠의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루비는 질질 새어흐르는 의혹에 더욱 굼떠진 동작으로 체육복을 꺼냈다. 정말 눈 앞의 와이스가 늘 체육복을 빌려주라 해도 '내 옷이든 네 옷이든간에 내가 벌점 받았으면 받았지 딴 사람한테 옷 빌려주는 일은 절대로 안 해. 딴 사람 옷 입는 짓은 더더욱 안 할거야.' 라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던 그녀가 맞는건가?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다소 멍하니 건내주려던 루비는, 아차 하더니 실컷 내민 체육복을 다시 확 끌어당겨 제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잡아채려고 손 뻗은 와이스는 덕택에 허공만 한 번 움켜쥐고 말았다.
 "…장난해? 내놔."
 아… 또 짜증났나봐. 루비는 더욱 강압적으로 내뻗은 와이스의 손바닥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힘없이 웃었다. 이대로라면 또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리고 말 게 분명했기에 루비는 지체하지 않고 입장부터 설명했다.
 "아,아니. 오늘 금요일이잖아. 그치?"
 "근데?"
 "우리 6교시에 체육이잖아."
 "그래서 뭐?"
 "……."
 여전히 누그러들지 않는 그녀의 독단적인 권리 주장. 그래서 뭐가 아니라, 같은 시간에 체육할 사람한테 체육복을 빌리려고 하면 어쩌자는 말. 루비는 일부러 아하하, 웃으며 최대한 선량하고 호의적인 말투와 어휘로 입을 열었다.
 "나,나도 그때 같이 체육해야 하잖아 와이스. 다른 사람한테 빌리는 게 좋지 않을…"
 "내놔."





















 
 학교 일과가 다 마칠 즈음 와이스의 교실에 들렸다. 열린 앞문 사이로 빼꼼히 고개만 내밀어 와이스가 앉는 책걸상을 보니 마침 그녀가 없다. 담임이 와 종례하기만 기다리며 왁자지껄 떠들고있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쳐 그녀의 책상 측면 갈고리에 걸려있는 책가방을 몇 번 뒤적. 자습서나 교과서만 있을 뿐 딴 건 보이지 않아 둘째론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자물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자물쇠 비밀번호 네 자리라면 이미 몇 달 전부터 훤하게 꿰고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그녀의 짝꿍한테 체육복 도로 잘 가져갔다는 말도 전해주어야겠단 생각을 하며 사물함을 열어보니 안엔 체육복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벌이 아닌 두 벌이 있었다는 점.
 "으엉?"
 뭐지? 또 빌렸나? 시간 없으니 내것만 가져가야지 싶어 2단으로 쌓여있던 체육복 중 위의 것을 꺼내 명찰을 보았다.
 Weiss Schnee.
 "어?"
 전혀 예상치 않았던 상황 전개에 석화되듯 멍하니 굳어버린 루비는, 때마침 이쪽 반에 종례를 하러 온 담임쌤 때문에 서둘러 들고있던 그녀의 것을 집어넣고 아래쪽에 있던 체육복을 들고서 줄행랑치듯 제 반으로 돌아왔다. 물론 사물함에서 뒷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와이스의 짝꿍에게 체육복 도로 가져간다고 말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 빨려고 꺼내보니, 그 체육복도 와이스의 것이었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와이스, 맨날 우리 교실 오는 애가 체육복 도로 가져갔다고 전해달래."
 "응?"
 와이스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제 사물함 쪽을 얼핏 봤다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갤 한 번 주억거렸다.
 들켰구나. 내일 대충 둘러대면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종례도 안 받고 강당엔 왜 갔어? 청소하러 간거야?"
 "남이사. 신경 꺼."
 같은 반 아이들 중에선 비교적 가장 친한 편에 속하는 짝꿍의 원치 않는 관심에 와이스는 째릿 흘겼다가 손에 들고온, 짙게 주름져 구겨져있던 체육복을 제 책가방에 똘똘 말아 쑤셔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은 물 먹은 솜 마냥 노곤하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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